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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이 모자라'…요즘 대치동 유치원생의 숨가쁜 하루 [대치동 이야기 ①]
2024/04/15


영어유치원 '성행'
4~5세 놀이식, 6~7세부터 학습식 인기
원비 월 200만원 육박
3세 영어, 6세 수학 입문



‘27조 1144억 원’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이다.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DP)의 2.6%이자 한국 간판 기업인 현대차와 기아차의 지난해 영업이익을 넘어서는 규모다. 영어유치원에서 재수학원까지 이어지는 사교육의 굴레는 가계 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는 수준까지 늘어났다.

‘대치동’이 대표하는 사교육 시장이 이토록 커지는 동안 정부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지난해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해 사교육비는 4.5%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사교육을 받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격차도 심화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24학년도 의과대학 입학생 중 네 명 중 한 명은 강남 3구(강남구·서초구·송파구) 출신이었다. 그 중 강남구 한 곳에서만 전체 의대 입학생의 20%가 배출됐다. 사실상 ‘대치동 교육’ 받은 아이들 판으로 변한 셈이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을 주무르는 대치동의 경쟁력은 어디서 올까. 두말할 것 없이 ‘경쟁’이다. 대치동을 비롯한 학원가에서 왕좌는 없다. 종로·대성학원 등이 장악했던 대입 시장은 ‘시대인재’라는 새로운 강자에 의해 재편됐다. ‘그 선생님 별로라던데?’ 입소문에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 무너질 수 있다.

학생들은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한 ‘4세 고시’, ‘7세 고시’ 등을 치르며 일찌감치 경쟁에 익숙해진다. 학부모들은 영어유치원 부터 영재교육원, 자사고, 특목고, 의대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필요한 입시 정보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유명한 학원 강사 수업을 듣기 위한 오픈런은 기본이고, 학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조부모까지 동원한 ‘라이딩’을 이어간다.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은 대치동의 속살을 살짝 드려다볼 수 있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해 매주 월요일 게재한다. 대치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시스템을 모르면 한국 교육의 업그레이도 불가능하다. 대치동이 어디인지, 대치동의 왕좌는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학생, 학부모, 강사들의 삶은 어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치동 이야기를 써 내려갈 계획이다.

대치동 유치원 학생들의 하루
서울 대치동 미도아파트에 거주하는 6세 A군의 하루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숨가쁘게 돌아간다. 아침에는 영어 애니메이션이나 동요를 들으며 등교 준비를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9시까지 영어유치원에 등교하고 오후 3시까지 원어민 선생님과 지낸다.

오후 3시 30분. 전문 보모가 하교를 돕는다. 집에서 간식을 먹고 집 근처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과 수영 교실을 번갈아 다닌다. 오후 5시께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 전까지 유치원 숙제나 수학 연산 학습지를 한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과외 선생님이 방문한다. 영어 회화 수업이나 한글·수학 학습지 선생님이 주 1~2회씩 오는 식이다. 주 1회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는 사고력 수학학원에 다닌다. 매일 자기 전 30분 한글 책 독서도 놓치지 않는다.취침 시간도 성장에 좋다는 이유로 오후 10시 이전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토요일 오전에는 동네 친구들과 농구 교실도 다닌다. 주말 오후, 영어 도서관에 들렀다 귀가한다. 영어로 시작해 영어로 일주일 일과를 마친다.
기저귀 떼면 부모는 고민 시작, 레테가 뭐길래

대치동 아이들은 생후 24개월이 지난 3살 무렵부터 영어 교육기관을 다닌다. 요즘 대치동에서 입학하기 어렵기로 손꼽는 유치원은 생후 20개월부터 입학이 가능한 A유치원이다.

A유치원의 경우 매년 10월경 원생을 모집한다. 이때 부모에게 필수는 '스피드'다. 미리 받은 웹주소(URL)로 신청일 오전 10시 정각에 들어가 입학 신청을 한다. 몇초 지나지 않아 마감된다. 선착순 등록에 성공했다는 알림을 받으면, 그 즉시 입학금을 입금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 다음 학생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바늘구멍을 뚫고 입학한 A유치원. 그런데도 4살이 되면 미련 없이 G유치원으로 전원을 준비한다. 영재 테스트 상위 5% 이내 합격증과 자체 영어 말하기·쓰기 시험으로 구성된 '레테(레벨테스트)'를 통과한 소수의 아이만 다닐 수 있다는 유명 유치원이다. 이곳의 입학시험을 대치동에선 '4세 고시'라 부른다.

레테는 말하기와 쓰기로 구성된다. 말하기의 경우 원어민 강사가 기본적인 자기소개, 계절, 날씨, 날짜, 교통수단, 도형 등을 영어로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쓰기 시험에서는 삼선 공책에 맞춰 알파벳을 쓸 수 있는지, 숫자를 영어로 쓰는지, 간단한 단어를 영어로 쓸 수 있는지 평가한다.

A유치원 입학이 치열한 것도 이곳을 다니면 G유치원으로의 입학이 수월하다는 이유에서다. 고등학교에서 매년 인서울·의치한수 합격생을 실적으로 내세우듯, A유치원의 아웃풋은 4세 원생의 G유치원 합격률이다.

이렇게 3세에 A유치원, 4세부터 G유치원 코스를 밟은 학생을 대치동에선 '성골'로 부른다. 대치동에서도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로드맵이다. 월 100만원 후반대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된다고 해도 입학 문턱이 워낙 높아 아무나 갈 수 없다.
월 200만원 육박하는 비용에도 입학 경쟁 치열

지난해 서울시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교습비와 기타 경비는 141만7000원이었다. 대치동 인근의 영어유치원 교습비는 더 비싼 편이다. 앞서 언급한 A유치원의 월 수강료는 셔틀버스 이용 시 176만원. 대치동 학원가에 위치한 P유치원은 급식비까지 포함해 187만원이다. 피복비 50만원과 재료비 40만원은 별도다.

A유치원→G유치원 코스를 밟지 않더라도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학생은 많다. '영어유치원'이라는 대전제 아래 대치동에선 '애바애(아이마다 맞는 교육 방식이 다르다는 의미)'가 통한다. 아이가 학습량을 소화하기 힘들어하거나 영어에 흥미를 잃는 듯하면 숙제가 없는 놀이식 영어유치원을 고려한다. 이런 이유로 유치원 앞에 뛰놀 수 있는 널찍한 운동장이 있고 숙제가 적은 개포동 소재 P유치원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와중에도 전국의 영어유치원은 성행하고 있다. 2019년 615개였던 영어유치원 수는 2022년 811개, 2023년 842개로 늘었다. 5년 새 37% 증가한 수치다.

영어유치원에선 대부분 미국 출판사의 유아, 초등용 학습서를 활용한다. 흔히 '파닉스(Phonics)' 교수법이라고 부른다. 교재를 활용해 알파벳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 여느 유치원처럼 신체활동, 동요, 미술, 창의 활동, 발달 교육, 예절 교육도 한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 학습 방식에 따라 학습식 유치원은 교재 1~2장 분량의 숙제가 있고, 놀이식은 신체 활동 시간이 더 많은 식이다.

대치동 인근의 인기 영어유치원을 5곳 이상 돌아봤다. 상호 노출을 꺼린 대치동 소재 한 영어유치원 관계자는 "학부모라더라도 예약 없이 방문하면 상담이 어렵고, 입학 대기 인원이 많아 학생들이 순번을 받고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좋은 '영유'라 부르는 기준은

상담조차 쉽지 않은 대치동 영어유치원 중 '좋은 영어유치원'은 어떤 기준으로 규정될까. 대치동에서 영유아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박은주(44) '링고맘에듀' 대표는 "우선 유치원생도 영어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도구가 있다"며 "영어 원서의 난이도를 구분한 'AR지수'에 따라 아이에게 책을 읽힌 뒤, 이해도를 묻는 방식으로 측정한다. SEL, SR 테스트 등 영어 능력 진단 프로그램을 활용해 주기적으로 아이의 학습 상태를 평가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좋은 유치원이 연령대별로 달라진다는 점도 요즘 대치동 영유아 교육의 특징이다. 과거엔 영어유치원을 학습 방식에 따라서만 구분했다면 이젠 더 정교해졌고 세분됐다. 3세는 영어 놀이 학교, 4~5세는 놀이식, 6~7세는 학습식에 다니고, 7세부턴 '프랩 학원'을 병행한다. 여기서 프랩이란 준비의 의미를 가진 영어단어 'preparation'에서 따온 말이다. 유치원 졸업 후 초등학생이 되면 다닐 대치동 빅5('I', 'P', 'ㄹ', 'ㅇ', 'ㅎ'학원 등)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한 어학원을 의미한다.

이런 구조에 따라 영어유치원 업계에선 "연령대에 맞는 유명 유치원에 몇 명이나 보냈는지"가 해당 유치원의 평가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5세부턴 과외도 많이 받는다. 대치동에서 과외 중개 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씨는 "전체 학생 중 미취학 아동의 비율은 20% 수준"이라며 유치원생의 과외 문의도 많다고 했다. 의뢰하는 수업 방식도 다양하다. 영어유치원이나 학원 숙제를 보조하는 '백업 과외', 영어 회화, 국제 학교 입학을 위해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 등이다. 비용은 시간당 6만원이다. 김 씨는 "유치원생의 경우 60분, 90분 단위로 주 1~2회씩 많이 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3세 영어 교육 이유? "수학 때문에"

대치동 미취학 아동 학부모들은 왜 영어교육에 몰두할까. 역설적으로 “수학 때문”이라고 답한 부모가 많다. 명문대, 의대 입시에서 관건은 수학이니 나중에 수학 공부할 시간을 벌기 위해 영어라도 미리 해두면 좋다는 설명이다. 대학 입시까지 내다보고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3세부터 영어를 친숙하게 접해두고, 간단한 필기가 가능한 수준으로 한글까지 습득되면 6세에는 주 1회 'ㅅ', 'C' 학원과 같은 사고력 수학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초등 수학 교과과정을 1년 만에 끝내는 것으로 유명한 'ㅎ'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이 또한 고등 교육 과정을 미리 습득해 입시 공부를 할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이외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이유로는 "영어 학습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직업을 갖든 영어는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영어 발음 향상을 위해", "영어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끔 만들어 주기 위해"라고 답했다.

대치동 학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만시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발육에 공을 들인다. 학습 능력뿐 아니라 외적 요소도 잘 갖춰 아이를 흠잡을 구석 없는 '육각형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다.이를 위해 유치원 하교 후 수영이나 태권도, 여아의 경우 발레 등의 신체 활동도 섭렵한다.

박은주 대표는 "대치동의 장점은 기질이나 성향이 모두 다른 아이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교육 기관이 다양하게 있다는 점"이라며 "대치동에서 교육받은 전문직, 대기업 직장인 출신 부모가 아이를 대치동에서 키우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이렇게 컸기 때문에, 적어도 이 정도 교육은 해야 사회적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영연/김영리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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