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빼앗긴 삼성전자가 반격의 칼을 빼 들었다.
HBM이 필요없는 신개념 ‘AI 가속기’(AI 학습·추론에 특화된 반도체 패키지)를 내년 초 출시해 AI 반도체 시장의 판을 뒤흔든다는 계획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의 최대 ‘큰손’인 미국 엔비디아 납품을 눈앞에 두는 등 HBM 경쟁력도 끌어올리는 투트랙 전략을 쓰기로 했다.
경계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사장·사진)은 20일 경기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2~3년 내 반도체 세계 1위를 탈환하겠다”며 이 같은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매출은 459억달러로 TSMC(668억달러), 인텔(514억달러), 엔비디아(495억달러)에 밀렸다.
경 사장은 지난해 실적 부진에 대해 “업황의 다운턴(downturn)도 있었지만 사업을 잘 못한 것도 있었다”며 “올해는 근원적 경쟁력을 회복해 시장의 영향을 덜 타는 사업구조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1위 탈환을 위해 시장을 주도하는 신제품을 대거 내놓겠다고 밝혔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H100’ 등에 대항할 수 있는 ‘마하 1’이 대표적이다. 경 사장은 “내년 초에는 마하 1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2030년까지 경기 기흥 연구개발(R&D) 단지에 20조원을 투입해 첨단 제품을 계속 내놓을 계획”이라고 했다.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삼성 HBM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현재 테스트하고 있고,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HBM 기술은 놀랍다”며 “엄청난 기술적 성과”라고 치켜세웠다.
이날 사업 전략 발표와 엔비디아와의 협력 가능성에 삼성전자 주가는 5.63% 오른 7만6900원에 마쳤다.
삼성전자 주총에 경영진 총출동…사업 전략 발표 마하1, HBM 필요없는 AI 가속기…엔비디아가 장악한 시장에 맞불
“고대역폭메모리(HBM)는 히트곡 하나 내고 사라지는 ‘원히트 원더’가 될 것이다.”(삼성 고위 관계자)
31년 연속 D램 세계 1위 삼성전자에 HBM은 ‘아픈 손가락’이다. 한수 아래로 생각했던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절치부심 끝에 찾은 전략은 ‘경쟁의 판 뒤집기’다. HBM이 필요 없는 인공지능(AI) 반도체를 개발하면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다고 본 것. 바로 그 제품이 ‘AI 가속기’(AI 학습·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 ‘마하 1’이다.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사장)은 2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연말에 마하 1을 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임 체인저’ 마하 1
경 사장은 이날 마하 1 설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하 1은 ‘AI 추론’에 특화한 AI 가속기다. 추론은 데이터 학습을 통해 고도화한 AI를 실제 서비스에 활용하는 과정이다. 현재 학습, 추론용 AI 가속기 시장 모두 엔비디아가 90% 이상 잡고 있다.
삼성전자는 마하 1을 통해 AI 반도체산업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온다는 구상이다. AI 가속기를 구성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은 대량의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AI를 고도화한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병목 현상’으로 불리는 속도 저하, 전력 소모 등이 발생한다.
삼성전자가 개발하는 마하 1은 데이터 병목 현상을 8분의 1로 줄이고, 전력 효율을 8배 높인 제품이다. 이렇게 하면 AI 가속기에 HBM 대신 저전력(Low Power) D램을 붙일 수 있다. SK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는 HBM을 삼성전자의 LP D램으로 대체하겠다는 얘기다. 업계에선 삼성이 엔비디아의 GPU 역할을 하는 칩도 자체 개발한 뒤 LP D램을 붙이는 최첨단 패키징 작업까지 ‘원스톱’으로 개발·양산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경 사장은 “HBM을 안 쓰고 저전력 메모리로 AI 추론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연말께 칩을 만들면 내년 초 마하 1으로 구성한 AI 시스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연구소 인력 두 배로 늘린다
삼성전자는 연구개발(R&D)을 강화해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2030년까지 경기 용인 R&D 단지에 20조원을 투입하고,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반도체연구소 규모를 2배로 키운다. 이를 통해 10나노미터(㎚: 1㎚=10억분의 1m) 6세대 D램, 9세대 V낸드플래시, 6세대 HBM(HBM4) 등을 줄줄이 내놓기로 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사업부는 3㎚ 공정으로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엑시노스 2500’(가칭)의 양산을 시작한다. 전장용 반도체와 통신용 RF칩 전용 공정 기술력도 끌어올리기로 했다. 최근 파운드리 경쟁자로 떠오른 인텔에 대해선 자신감을 피력했다.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은 “삼성전자는 (인텔과 달리) 중앙처리장치(CPU)뿐 아니라 모바일 AP, 시스템온칩(SoC), GPU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공급한 경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신사업으로는 최첨단 패키징, 차세대 전력반도체, 증강현실(AR) 안경용 마이크로 발광다이오드(LED) 기술을 제시했다. 경 사장은 “어드밴스드 패키징 사업은 올해 2.5D 제품으로 1억달러 이상 매출을 올릴 것”이라며 “실리콘카바이드(SiC)와 질화갈륨(GaN) 등 차세대 전력 반도체와 증강현실(AR) 안경을 위한 마이크로 LED 기술 등을 적극 개발해 2027년부터 시장에 뛰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근원적 경쟁력 강화
이날 주총에선 지난해 DS부문 영업적자(14조8700억원)와 위기관리 대책에 관한 질문이 많이 나왔다. 경 사장은 “업황의 다운 턴(하강 국면)도 있었고, 우리가 준비하지 못해 사업을 잘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며 “근원적인 경쟁력이 있었더라면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어 “올 1월부터 흑자 기조로 돌아섰다”며 “올해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