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간 병가 50일, 병조퇴 25시간, 외출 13회
정상 근무는 월평균 5일에 불과
적응장애라면서 병가 중 시민단체 활동
감사 들어오자 '고소'하고 무단 촬영까지
법원 "병가 중 사적 활동 금지 아냐" 직원 손 들어
"유치원장이 연가 신청 반려 안한 것도 책임방기"
전문가들 "병가 남용 방지 수단 마련해야""병가를 1년째 사용 중인 직원이 한달간 해외여행을 간다네요. 이 사람 때문에 근무를 분담한 동료 직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는데 또 병가 연장을 한다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공기업 인사담당자의 고민 글이다. 법정 일수가 정해져 있는 연차와 달리 병가의 경우 사용 사유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 없다. 병가 중 다른 활동을 해도 통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런 가운데 잦은 병가·조퇴 등을 쓰고 개인 활동을 했어도 해임 대상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이 나와 화제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유치원 주사보로 일하던 A씨가 경기도 교육감을 상대로 청구한 해임처분무효확인청구의 소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A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병가쓰고 시민단체 활동...정상근무 한달에 5일
2002년 10급 지방조무원으로 임용된 A는 2018년부터 경기도 교육청 산하 유치원에서 주사보로 근무해 왔다. 그러던 2020년 5월 A는 교육청으로부터 성실의무, 겸직금지 의무 등 위반을 이유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유치원장 허가 없이 노조 설립을 위한 시민단체 간부를 맡는 등 겸직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계 이후에도 A는 병가와 조퇴를 남발했다. 이 과정에서 A는 2020년 3월 초부터 약 4개월 동안 50일의 병가와 24시간 40분의 '병 조퇴'를 사용했다. 또 9일의 연가, 개인 사정을 이유로 한 13회에 걸친 1∼4시간짜리 외출·조퇴를 남발했다. 결국 하루 8시간을 온전히 근무한 날은 월평균 5일이었고 어떤 달은 이틀에 그쳤다.
문제는 A가 병가기간 동안 12회에 설쳐 노조·시민단체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지부장 자격으로 교육청, 경기도의회, 장학사 유치원 방문 현장 등을 찾아갔고 교육지원청에도 지부장이라며 민원전화를 넣기도 했다.
교육청은 감사에 착수했지만 A는 '인격 모독'이라며 협조를 세 차례나 거부했다. 되레 감사한 직원들을 직권남용이라며 고소하고 얼굴을 무단 촬영하고 교육청 정문에 허위사실이 담긴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결국 2020년 10월 교육청은 A에 '해임' 처분을 내렸다. 교육청은 "정상 출근일이 극히 적었고 출근해도 불성실하게 직무에 임했다"며 "‘병가의 목적 외 사용 및 직무 태만’으로 성실의무를 위반했다"라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선 A씨가 소독을 이유로 유아 놀이터에 소금을 뿌리거나 유치원서 수시로 담배를 피우며 장시간 개인 통화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A는 "병가 중 몇 차례 외부 활동을 한 사실은 있다"면서도 "공익 목적 활동으로 보수도 안 받았고 이후 잘못을 깨닫고 직위에서 사퇴했다"고 해명했다. 또 2020년 3월부터 1년 넘게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등 정신과적 증상으로 치료받았고 결국 정신과에서 ‘적응 장애’라는 진단받았다는 자료도 제출했다.
법원 "병가 승인 관리자, 책임 방기"
법원은 A의 병가 사용이 '허위'가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A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 병가를 낸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진단서 등에 따르면 A는 노조 활동과 직장 내 갈등, 아내 건강 등 여러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렇다고 병가 중에 일체 사적 통화나 모임 참석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며 "중한 증상이 있어야만 병가가 허용된다고 볼 수 없는 이상 A가 허위 병가를 냈다고 보기엔 부족하다"라고 꼬집었다.
잦은 외출·조퇴·병가 사용이 '성실의무'를 위반한 것도 아니라고 봤다. 법원은 "병가 기간을 제외하면 4개월 동안 9일의 연가, 1일의 공가, 13회에 걸친 1∼4시간의 외출·조퇴를 사용했지만 모두 허가 범위 내"라며 "유치원장이 연가 신청 등을 반려하지도 않는 등 연차 사용이 유치원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부족하다"라고 꼬집었다.
뒤늦게 교육청은 A가 유치원장에게 위압적 행태를 보여 어쩔 수 없이 병가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병가 승인 및 그 기간의 결정은 승인권자의 책무"라며 "병가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승인권자는 당연히 허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오히려 승인권자들이 스스로 책무를 방기했다는 것"이라고 꾸짖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법원은 병가 사용에 대한 인사권자의 통제 노력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라며 "공공기관 등에선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통제 노력을 증거로 남겨 놓는게 좋다"고 설명했다.
병가자가 실업자 두 배인 英
이런 가운데 한국은 지난 2022년부터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상병수당이란 취업자가 업무 외 질병이나 부상으로 경제활동이 불가한 경우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전해 주는 제도다. 업무상 이유로 다치는 '산재'가 허용되지 않아도 수당을 주는 게 골자다. 보건복지부는 10개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실시 중이며 올해 하반기부터 14개 지역으로 확대 시행한다. 시행 중인 10개 지역을 분석한 결과 총 9774건에 대해 1인당 평균 18.5일, 84.7만 원이 지급됐다.
다만 병가 제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경우 좋은 취지와 달리 앞서 사례처럼 개인적 업무, 겸직 등을 위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해외에선 이런 '모럴해저드' 현상이 심각하다. 지난 19일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병가 문화'에 개혁을 천명했다. 장기 병가에 따른 비경제활동 인구가 전례 없이 급증하면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영국의 장기 병가 중인 근로자는 280만명으로 구직활동 중인 실업자 수의 2배다. 지난해 장기 병가와 복지 수당을 받는 데 필요한 업무 적합성 진단서만 1100만건이 발급됐다.
한 노사관계전문가는 "한국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말고 시범사업 결과를 철저히 분석해 병가 남발을 방지하고 상병수당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정밀한 제도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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