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동업자'서 경쟁자로
방어하던 고려아연 공격 태세
'영풍 자금줄' 서린상사와 절연
함께 쓰던 유통·무역망 등 분리
양측 갈등 근간 '신사업 시각차'
고려아연 "배터리 등 적극 투자"
영풍은 "무리한 리스크 피해야"고려아연이 서린상사와 관계를 끊기로 한 것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변경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창업 3세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은 경영에 간섭하려는 영풍 측의 도발에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선에서 대응을 자제해왔다. 그러다 지난 19일 주주총회에서 영풍 측 주장인 ‘배당 확대’ 안이 3대주주인 국민연금의 반대로 무산되자 고려아연이 태세를 전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력 공유·원료 공동구매 중단”
고려아연 관계자는 24일 “오랜 내부 회의 끝에 영풍을 더 이상 동업자가 아닌 경쟁자로 규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말했다. 비철금속 분야에서 양보 없는 전쟁을 치를 각오가 돼 있다는 선언이다. 서린상사와의 관계 정리는 이를 위한 첫수다. 서린상사는 창업주 양가 우호 관계의 상징과도 같다. 사업보고서상 서린상사의 최대주주는 고려아연(49.97%)이지만, 대표이사는 영풍을 이끄는 장씨 일가 창업 3세(장세환)가 맡고 있다.
영풍그룹은 고려아연과 영풍이 만든 비철금속 제품을 서린상사를 통해 유통해왔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그동안 서린상사는 사업 영역이 겹치는 아연, 황산 제품 유통에서 마진이 높은 계약 건은 영풍 제련소가 만든 제품으로, 마진이 낮은 계약 건은 고려아연 제련소가 만든 제품으로 거래하는 등 불합리한 결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풍 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경영 분리를 위해 빌미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서린상사가 영풍 계열의 알짜 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조치로 장씨 일가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려아연이 거래를 끊으면 당장 매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비철금속 시장 내 영풍의 입지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려아연이 영풍과의 모든 ‘공동 경영 프로그램’을 중단하기로 해서다.
창업 3세 때 무너지는 동맹
그동안 영풍은 고려아연과 원료를 공동 구매하면서 ‘거래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려아연은 회사 내 영풍 측 파견 인력을 돌려보내고, 정보기술(IT) 시스템 등 공동으로 사용하던 각종 회사 운영 프로그램도 따로 쓸 방침이다. 영풍 측 생산 능력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영풍의 석포제련소는 현재 소송, 조업정지 처분 등으로 아연을 감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전엔 고려아연 계열 제련소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고려아연의 의도는 영풍 장씨 일가의 현금원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서린상사만 해도 장세환 대표 등이 지난해 배당금으로 21억원을 받았다.
영풍그룹의 지배회사인 영풍은 지난해 매출 3조7617억원, 영업손실 1698억원을 기록했다. 영풍 측 주요 계열사인 코리아써키트도 321억원 손실을 봤다. 영풍전자는 영업이익이 116억원으로 전년(635억원)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이에 비해 그룹의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는 고려아연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9조7045억원, 6599억원에 달했다. 영풍그룹 내에서 고려아연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출 기준 약 73%에 달한다.
배터리 투자에 대한 시각차 ‘뚜렷’
영풍 측은 고려아연의 경영 분리 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최대주주가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영풍 관계자는 “모든 갈등은 이사회 구성 등 경영권이 고려아연의 지분구조와는 완전히 괴리돼 있다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지분은 영풍 측이 많은데 최윤범 회장 등 최씨 일가가 독립적인 경영권을 주장하는 것은 주식회사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등의 근간에는 ‘신사업 진출에 대한 시각차’도 있다. 고려아연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 등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투자를 위해 차입을 늘리고 배당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반면 영풍은 고려아연이 무리한 리스크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상훈/김우섭 기자 uphoon@hankyung.com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